I. 시작부터 틀렸다. 철학이 보기에 한국 정치 전체가 ‘부적합 판정’

한국 정치판을 철학자가 보면 첫 문장은, 이런 실험 중단해야 한다. 칸트라면 공화국의 조건을 묻기도 전에 ‘저건 이성이 아니라 변명의 공동체’라 하고, 아렌트는 ‘진실이 아니라 연출이 지배하는 극장정치’라며 비웃을 것이다.

지금 여야는 서로를 ‘국가 위기’라 외치지만 서로 자신만이 선이라고 믿는 모습은 니체가 말한 ‘도덕의 위선적 가면’을 정확히 실천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가면이 너무 헐렁해서 다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만 못 본 척하고 있을 뿐.

II. 12.3 계엄 소동, 이미 끝난 시험지를 들고 “이게 국가 비전이다”라 우기는 참사

12.3 계엄 소동은 철학의 관점에서 단 하나의 질문만 남긴다. 이건 악의인가 무능인가? 이미 끝난 시험인데 정답 고치겠다며 시험지를 다시 꺼내 든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둘째, 이해는 했지만 모르는 척해야만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이거나, 그리고 한국 정치의 전통은 언제나 둘 중 나쁜 쪽에 가깝다.

민주당은 사과가 부족하다며 무한반복 사과 요구 모드를 켰고, 국민의힘은 그걸 또 생색낼 기회로 삼으며 기묘한 정치적 자학 개그 컬래버를 펼쳤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사실 이런 걸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가 하도 전설적인 기행을 반복하니 이제는 악의조차 평범해지고 있다.

III. 민주당, 정의의 이름을 가장 열심히 외치지만 정의와 가장 멀리 서 있는 역설

민주당이 요즘 외치는 정의는 이상하다. 정의를 말하지만, 절차는 무시하고, 공정을 걱정한다며 사실은 힘의 균형을 뒤틀고, 국민을 위한다며 실제론 우리 진영만 위한다. 칸트식 표현을 빌리면 ‘정언명령을 말하는 입으로 가설 명령을 집행하는 중’이다.

게다가 상대가 사과하면 그건 예비 사과고 본시험 사과는 따로 있다며 끝없이 사과를 인플레이션 시키는 능력은 거의 유럽 중앙은행 수준이다. 아렌트는 ‘정치란 세계를 함께 만드는 행위’라 했는데 민주당은 지금 정치를, 사과를 짜내는 기계 정도로 취급한다.

이쯤 되면 정의라는 단어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철학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전투용 구호로 전락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상황을 ‘폴리스의 타락’이라 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뉴스 헤드라인’이라 부른다.

IV. 국민의힘, 사과만 반복하는데 책임도 철학도 실체도 없다.

국민의힘 역시 억울할 필요 없다. 민주당이 정의를 오용한다면 국민의힘은 책임을 오용한다. 무조건 ‘사과드린다’로 시작하고 ‘깊이 반성한다’로 끝나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다. 니체는 이를 두고 ‘도덕은 약자의 무기’라 했는데, 국민의힘이 지금 사용하는 ‘반성의 정치’는 무기가 아니라 방패다.

비판받으면 사과하고, 또 사과하고, 또 사과한다. 이 정도면 사과가 아니라 정치적 기절 훈련이다. 하지만 그런 사과에 철학은 없다. 왜 잘못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어떤 원칙이 파괴됐는지 말하지 않고, 다음엔 어떻게 할 건지도 없다.

일종의 무한반복 면책 기도문일 뿐이다. 이러니 민주당은 사과가 부족하다고 물고 늘어지고, 국민의힘은 ‘사과했잖아!’하며 억울해한다. 철학적 기준으로 보면 둘 다 틀렸고 둘 다 민망하다.

V. 결국 문제는 양쪽 모두, 한국 정치는 지금 ‘철학 부재’라는 이름의 집단 파산 상태

이쯤에서 결론은 명확해진다. 민주당은 정의를 오용하고, 국민의힘은 책임을 남용한다. 둘 다 정치의 목적을 잊었다. 정치란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지, 보복·면책·사과 경쟁의 서바이벌 예능이 아니다.

칸트는 ‘이성은 공공성을 향할 때 도덕성을 획득한다’라고 했다. 지금 한국 정치의 이성은 공공성을 향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편, 자기 이익, 자기 생존만 향한다. 그러니 이 정치는 도덕적일 수 없고, 합리적일 수도 없다.

아렌트는 ‘정치는 진실을 다루지 않을 때 전체가 붕괴된다’라고 했는데 지금 한국 정치는 진실보다 스토리텔링을 선택했고, 원칙보다 프레임을 선택했다. 그래서 붕괴가 아니라 붕괴의 사전 단계, 즉 정치적 좀비 상태에 들어가 있다.

VI. 철학이 말하는 마지막 충고, ‘사과와 프레임’ 말고, 드디어 국가 얘기를 시작하라

철학이 이 정치판에 드릴 말은 단 하나다. 사과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미래를 논하는 것이고 제도와 원칙을 세우는 것이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당들은 사과할지 말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 누가 누굴 더 오래 물고 늘어질지로 하루를 보낸다.

이쯤 되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떠오른다. 틀렸던 정치가 똑같은 방식으로 끝없이 반복된다. 같은 말, 같은 싸움, 같은 진영논리. 한국 정치의 영원회귀다. 철학은 이렇게 결론 내릴 것이다. 사과할 시간에 국가를 설계하라. 진영을 지킬 시간에 시민을 지켜라. 그리고 프레임을 만들 시간에 진실을 세워라. 지금 그 말이 한국 정치에서 가장 절실한 문장이다.

고무열 박사(안전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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